허위 통계에 기반한 주장... 연구자 '대다수 일본인, 해방 직후 본국으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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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월요일 2023/10/10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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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HIM Kyu-Seok, AFP 한국
해방 후 한반도 잔류 일본인 수가 70만에 달했고, 이들이 신분 세탁을 거쳐 한국의 친일파가 됐다는 주장이 소셜미디어상에서 반복적으로 공유됐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 및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한반도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대다수가 해방 직후 미군정의 지시로 귀국했으며, 잔류한 소수가 친일파로 둔갑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희박하다.

문제의 주장은 2023년 9월 19일 페이스북에 공유됐다.

"친일파가 많은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글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200만의 일본인이 한반도로 이주했고, 이 중 해방 직후 130만 명이 일본으로 귀환했는데, 한반도에 잔류한 나머지 70만은 "축적한 재산이 너무 많고 아까워서 귀국 포기"와 "신분 세탁"을 거쳐 한국의 친일파를 구성하게 됐다는 주장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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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주장이 공유된 페이스북 게시글 스크린샷. 2023년 9월 26일 캡쳐.

동일한 주장이 페이스북 여기, 여기, 여기, 여기에도 공유됐다.

그러나 이 수치는 여러 사료에 기록된 한반도 일본인 인구 변화 추이와 불일치하며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잔류 일본인이 친일파로 위장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일제강점기 인구통계

한반도의 일본인 인구 변화는 조선총독부가 수십 년간 집계한 수치와 미군정청이 종전 직후 실시한 인구 조사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한반도 거주 일본인 수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백만을 초과한 사례가 없다.

전후 한일관계에 정통한 최영호 전 영산대학교 일어학과 교수는 지난 9월 25일 AFP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조선종전의 기록' 저자 요시오 모리타가 수집한 통계 자료에는 1944년 5월 기준으로 한반도에 거류한 일본인 민간인의 수가 712,583명으로 나타난다"라고 설명했다 (아카이브 링크).

최 전 교수에 따르면 해방 직후 한반도의 일본인 유지들은 일본 거류민 귀환 원호 활동을 위해 조선총독부의 권유로 세화회(世話會)라는 민간단체를 설립했는데, 모리타는 당시 세화회 비서로 근무하며 귀환 활동에 직접 관여했으며 이 경험과 일제강점기 자료를 바탕으로 1964년 '조선종전의 기록'을 집필했다 (아카이브 링크).

모리타가 수집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 인구 통계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이연식 박사가 2009년 발표한 논문에도 인용됐는데, 1875년에서 1944년 5월까지의 한반도 거주 일본인 인구 추이를 기록한 도표는 다음과 같다 (아카이브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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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식 박사의 2009년 박사논문에서 발췌한 한반도의 일본인 인구 추이 도표.

도표에 따르면 19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한반도의 일본인 수는 1943년 76만여 명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모리타가 수집한 통계는 로리 와트(Lori Watt)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역사학과 교수가 전후 일본인 귀환 및 재편입 과정을 소개한 2009년 저서 "When Empire Comes Home: Repatriation and Reintegration in Postwar Japan"에도 여러 차례 인용됐다 (아카이브 링크 여기여기).

와트 교수는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정이 추산한 한반도의 일본 민간인 인구는 72만 1백 명 (북한 약 26만 5천 명, 남한 약 43만 5천 명), 일본 군인 수는 29만 4천 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연식 박사는 2010년 연구를 통해 세화회를 비롯한 인양원호국 통계를 기반으로 일본인 귀환자 중 한반도에서 온 사람은 92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히며, 이들 중 상당수는 남만주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귀환 국면에서 한반도로 남하했기 때문에 수치상 혼란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아카이브 링크).

이 박사의 연구를 비롯하여 한국학, 근대사 국제학술지 등에 실린 관련 논문에서도 종전 당시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이 2백만에 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아카이브 링크 여기여기).

일본인 귀환 과정

일본인 귀환 과정 관련 사료와 이 주제에 정통한 학자들은 종전 직후 일본으로부터 한반도 통치권을 이양받은 미국과 소련 군정의 지시에 따라 대다수 일본인들이 본국 송환된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당초 미군정 당국은 일부 일본인의 잔류에 대해 낙관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점차 심해지자 1946년 1월 38도선 이남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미군정청의 직간접 사무 담당자와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귀환하도록 지시했다 (아카이브 링크).

와트 교수 저서에도 미군정청이 1946년 특정 소수 인원을 제외하고 모든 일본인에게 귀환을 지시했으며, 이들은 세화회의 주도 하에 비교적으로 평화적인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반면 이연식 박사 연구에 따르면 소련군이 점령한 한반도 북부의 일본인 귀환 과정은 비교적 강압적인 양상으로 전개됐는데, 이 지역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약탈행위로 인해 미군이 주둔한 지역으로 집단 남하했으며 일부는 소련군에 의해 강제 노동에 징집되기도 했다.

이 박사는 논문에서 "소련 측은 1946년 2월 말에 비로소 북한에 체류 중인 일본인을 송환할 용의가 있다고 GHQ(미국)측에 통보했고, 5월 들어 교섭을 개시했다"라며 "같은 해 12월 북한의 일본인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소련 점령지역 일본인 송환에 관해 미소 간 협정을 체결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공미희 부경대학교 교수도 AFP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종전 직후 한반도에 일본인 거류민은 약 92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미군정의 지시로 1946년까지 거의 모두 본국으로 귀환했다고 말했다 (아카이브 링크).

공 교수는 "당시 일본인들은 본국이 폐허가 된 데다 생활의 터전도 없는 곳으로 귀환하는 것을 꺼려 잔류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라며 "일본 정부도 초기에는 일본인들의 일괄적인 귀환은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인 불안정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판단해 잔류 유도와 함께 제한적인 귀환을 추진하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공 교수는 이어 "당초 일본인의 잔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미군정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의 정도가 점점 심해지자 일본인의 위험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미군정청은 일본인의 집결거주 또는 귀환을 권했고 이에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은 일본인의 귀환 작업을 빨리 서둘렀다"라고 덧붙였다.

미군정 주한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William Langdon)이 1945년 12월 14일 미 국무부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한국의 정치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미군정이 실시한 첫 번째 조치는 한반도 주둔 일본군을 모두 일본으로 송환하는 것이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아카이브 링크).

최 전 교수와 공 교수는 한반도에 잔류한 일본인이 신분을 바꾸어 한국의 친일파가 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입을 모았다.

최 전 교수는 "이를 사실로 믿고 싶은 사람도 있겠으나, 해방 당시 한반도에 팽배했던 반일 감정을 감안한다면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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